천년의 발자취를 따라

아리마 온천의 신비로운 매력 탐구

Written by Carol Lin
15 January 2015

전설속의 아리마 온천의 발견은 일본국토를 개척한 세 신중의 오나무치노미코토와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이다.원고시대에 두 신이 아리마에 왔을 때 세마리의 상처입은 까마귀가 웅덩이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얼마되지 않아 까마귀의 상처가 스스로 나아지는 것을 보고 온천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일본의 고전문서《일본서기》 에 적혀있는 기록을 보면 조 메이 천황(기원 631)과 고 토쿠 천황(기원 647)이 여러차례 이 곳을 방문하여 아리마가 그 후부터 유명해 진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의 각지역의 온천역사중에서 아리마 온천의 서적이 가장 많고 고대에는 귀족과 승려만이 아리마에서 온천욕을 하였다. 일반 서민들이 온천여행을 시작한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시기에 아리마 온천 시가를 정돈한 후 부터였다. 아리마온천은 자고로 부터 병과 상처를 치료하를 효능이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문화에서 강조하는 온천 치료법와 많이 연관된다. 사람들은 먼 곳의 온천에서 목욕을 하기 위해 발전한 곳이 바로 온천여관 문화이다. 온천에서 숙박,음식,풍토,역사까지 연관되어 있고 아리마 온천은 일본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를 가진 온천여관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일본전통문화 체험의 상징이 되었다.

연구기록에 의하면 일본의 목욕문화는 불교에서 기원 되었는데, 이는 깨끗하고 욕망이 없는 신성한 신앙을 대표하였으며 나아가 서민들의 일반활동으로 발전된 것이다. 하여 아리마 온천는 불교문화와 많이 연관되어 있다. 《아리마 온천 사화》에서 천황이 다녀간 후에 아리마는 많이 유명해 졌지만 얼마되지 않아 쇠패하게 되었는데 다시 흥하게 한 사람이 바로 나라시대의 승려 교기였다고 기록하였다.

승려 교기는 일본에서 개설한 사원에는 승려들이 많았고 전국각지역에서 설교와 동시에 온천을 개발하여 도랑을 파고 다리를 놓았으며 사원을 건설하는 많은 공헌을 하여 위대한 유적을 남겼다. 당시 승려 교기가 수행도중에 아리마에 도착하여 병든 노인을 돕게 되었는데 병 치료가 끝나자 노인은 부처님이 되어 교기에게 쇠패되는 아리마 지역을 새로 건축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교기는 아리마 지역에 사원을 짓고 약사 여래 불상을 조각했으며 사원의 이름을「온천사」로 하였다. 현대일본학자의 연구로는 에도시대의 환자들은 온천치료전에 약사 여래를 참배하는 예의를 가졌다고 한다. 온천욕의 행위는 종교문화와 많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카마쿠라 시대, 아리마는 홍수의 재해를 입게 되어 백년동안 마을이 황페되었다. 야마토국의 요시노 고원사의 승려 닌사이가 아리마를 다시 복건하게 되었다. 당시 닌사이가 신의 감화를 받아 아리마에서 황무지를 개간하고 건물을 수리하였으며 온천을 개발하였다는 내용이 17세기후의 문헌에 나타났다.「아리마 쥬우니보우」의 기록에는 닌사이가 12개의 온천여관을 재건한 내용은 역사적으로 입증이 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그시기부터 아리마에서 온천여관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고 본다.

아리마 지역은 롯코산 내에 있으며 많은 신사사당이 존재한다.아리마의 수호신인 오나무치노미코토와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의 탕천신사에는 매년 1월 2일에 「헌탕제」가 있다. 맨 처음의 온천물과 숯울 신에게 바쳐 아리마의 번영을 기도한다. 불교의 사찰, 정토종의 극락사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내의 유적지를 재건한 념불사에 삼백년 되는 사라쌍수가 있는데 초여름에 꽃피고 아름답고 우와한 꽃잎이 땅에 떨어져 불교의 선의가 나타나는 그림으로 된다. 봄에도 적막하지 않다. 선복사의 산문에 들어서면 이백년되는 수양 벚꽃이 있는데 묘견사, 보천사, 임계사의 사찰과 함께 조용히 사계절을 보내며 아리마 온천의 토지를 지켜주고 있다.

  • photo by kaneyan

아리마와 연관되는 역사 인물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전국시대의 대장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다. 전국시대의 긴 전쟁끝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규모적으로 전쟁에서 파괴된 아리마 온천을 재건하였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여러차례 이 곳에서 휴양하였고 다도의 성자로 불리우는 센노 리큐를 청하여 아리마에서 정식적인 다회를 개최하게 하였다. 다회의 개최지는 현재의 즈이호우지 공원으로 지금도 이 다회를 매년마다 개최하여 아리마 온천의 가을계절의 새로운 풍경으로 되었다.

이후부터 아리마 온천은 에도시대의 후기까지 흥행하게 되었다. 이곳에 온천여관이 생긴후부터 많은 일본의 귀족, 학자, 작가들이 찾아와 최고의 번성기를 가졌으며 19세기 분카분세이시대에「이리마 센겐」의 이름을 남겼다.

현재 온천사 뒤쪽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름으로 만든「다이고노 유고데인」이 있다. 이곳에는 아리마 온천역사에 연관되는 서적재료와 한신대지진 이후에 발굴된 온천유적지가 전시되어 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하여 건축한「유노야마고텐」이 유적지의 전신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 온천을 사용해보지 못했다.

현재 아리마 온천역 출구부근의 친수공원은 타이코 다리와 네네다리가 있는데 다리위에는 네네의 조각상이 있다.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제외하고 전국시대의 군사 쿠로다도 아리마 온천에서 상처를 치유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는 일본 NHK대하드라마에도 방송이 되었다.

1995년 한신 대지진은 고베지역이 가장 큰 손해을 받았으며 손해가 큰 아리마 온천 협회에서도 부단히 관광산업을 회복하는 기획을 내놓아 사람들이 다시 방문하게 노력하였다. 오늘의 아리마는 간사이 지역의 제일 온천마을로 회복이 되었고 관광자원개척과 참신한 체험으로 아리마의 매력을 보여주려고 한다. 예를 들면 「다이고노덴」의 공공욕장,「아리마노우료우가와 자시키」의 여름철 축제, 「아리마 온천 로지우라 아트 프로젝트」등이 모두 국제관광사업과 통합하였다. 2014년 대만의 신주현의 견석온천과 자매온천을 맺어 더 많은 국내외 관광객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아리마를 보게하고 체험하게 하여 고전과 현대적인 요소들이 모여있는 천년의 문화 매력을 살리려 한다.